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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도 인정한 독종...최정 "그저 야구가 잘 하고 싶어서" [IS 피플]

'야신' 김성근 전 감독이 직접 진행하는 수비 훈련은 혹독하기로 정평이 났다. 선수가 숨 고를 틈도 없이 펑고(수비 훈련을 위해 쳐 주는 땅볼)를 하며 혼을 빼놓는다. 일종의 정신력 테스트이기도 했다. 최정(37·SSG 랜더스)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근성은 김성근 감독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2006년 10월, SK 와이번스(현 SSG) 감독으로 부임해 마무리 캠프에서 최정을 지도한 김 감독은 펑고 1000개, 프리배팅 1000개를 매일 소화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오히려 독기가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어린 선수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김 감독은 수많은 제자들 중 자신의 훈련을 100% 소화한 건 최정뿐이었다고 돌아보기도 했다.야신이 인정한 '독종' 최정은 매 시즌 성장했다. 꾸준히 좋은 기량을 유지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거듭났다. 그사이 홈런왕 타이틀도 3번이나 차지했다. 최정은 지난 24일 부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홈런 새 역사를 썼다. 5회 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상대 투수 이인복의 초구 슬라이더를 공략해 좌월 솔로홈런을 쳤다. 2024시즌 10호이자, 개인 통산 468번째 홈런이었다. 최정이 '국민타자' 이승엽(현 두산 베어스 감독·467개)을 넘어 KBO리그 통산 홈런 부문 단독 1위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야구팬은 타고난 힘이 좋고, 강한 신체를 갖고 있는 최정을 '천재형' 선수로 평가한다. 반면 그를 오래 지켜본 동료들은 '노력형'이라고 확신한다. 2007년부터 한솥밥을 먹은 SSG 에이스 김광현은 "(최)정이 형은 아직도 경기에 나가기 전 생기는 긴장감을 없애려고 배트를 더 돌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작 최정은 자신을 노력형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기록을 세운 24일 롯데전 뒤 만난 최정은 "노력은 다른 선수들이 나보다 더 많이 하는 것 같다"라며 "나는 그저 재밌는 게 있으면 그걸 잘하고 싶은 마음이 워낙 큰 편이다. 김성근 감독님과 훈련할 때도 '수비도 기술적으로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몸이 힘들어도 하다 보면 실력이 좋아지는 게 느껴져서 '힘들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격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최정은 객관적으로 불편한 훈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최정은 "타격·수비·주루 중에서도 어떤 건 재미가 없는 것도 있다. 나는 어떡하든 그 안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으려고 한다. 실력이 느는 게 느껴지면 기분이 더 좋아서 빨리 다음 경기를 치르고 싶었다"라고 돌아봤다.사람들이 '노력'이라고 부르는 걸 최정은 그저 '좋아서 하는 행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김성근 감독이 인정한 근성과 독기의 원천은 누구보다 깊은 '야구 사랑'이었다. 최정은 남은 선수 생활도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생각이다. 이전까지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 건 꾸준히 좋은 기량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록 목표도 매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치는 것이었다. 이젠 통산 500홈런을 향해 나아간다. 최정은 "당장 올 시즌 홈런왕이나 '몇 개를 치겠다'라는 목표를 세우진 않았다. 그래도 이젠 마음가짐을 조금 바꿔보려고 한다. 이전보다 큰 목표를 세웠다. 통산 500홈런을 치고 싶다. 쉽게 해낼 것 같진 않다. 그저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라며 웃어 보였다. 안희수 기자 anheesoo@edaily.co.kr 2024.04.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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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윤의 야구 본색] 해체 위기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웅지세무대 야구부

웅지세무대학교엔 야구부가 있다. 지난해 3월 창단해 첫해부터 대학야구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7월 말 열린 경기도야구협회장기 및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결승까지 올라갔다. 성균관대에 패해 우승 문턱은 넘지 못했지만, 웅지세무대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빛났다. 대학야구 모 관계자는 "야수들이 부족해 자기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뛴 선수가 적지 않았다"며 "신입생 야수가 보강된다면 내년에는 우승도 노려볼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웅지세무대에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11월 말 정부의 부실대학 선정을 피하고자 3년제에서 4년제로 전환, 4개 학과를 1개 학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야구부 해체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유영준 웅지세무대 감독은 "팀 해체를 막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며 "신입생을 받지 않고 기존 선수들이 졸업하는 2025년까지는 팀이 존속하기로 이야기됐다"고 설명했다.큰 위기는 넘겼지만, 신입생을 수혈할 수 없어 전력 보강은 언감생심이다. 야수진의 뎁스(선수층)가 얇다. 2학년 투수 박서진은 "투수진은 어느 정도 뎁스가 두껍지만, 야수들은 아니다"며 "부상자가 나오면 시즌 운영도 어려운 상황이다. 야수들이 다치지 않고 야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팀 해체 위기에 전력 보강도 어려운 이중고에 시달리지만, 조직력은 오히려 단단해졌다. 올해 주장을 맡게 된 2학년 외야수 정승구는 "팀 해체라는 위기를 겪고 있으나 선수들 간의 단결력은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다"며 "좋은 과정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희망했다. 지난해 대학리그 팀 성적은 4승 9패. 승률(0.308)이 3할대에 머물렀지만 1학년 위주의 팀이라는 걸 고려하면 나쁜 성적은 아니다. 팀에서 유일하게 3학년인 포수 한동하는 "경기 중반까지 앞서거나 대등한 경기를 펼치다가 막판에 무너질 때가 잦았다"며 "지난 1년간 경기 경험을 쌓은 만큼 올해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는 포부를 밝혔다.야수진이 두텁지 않은 만큼 치열한 포지션 경쟁은 기대하기 어렵다. 누구나 경기에 뛸 수 있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2학년 포수 전성현은 "어차피 드래프트 지명을 받으려면 다른 팀 선수와 경쟁할 수밖에 없다. 팀 내 경쟁보다는 같은 포지션의 다른 팀 선수와 경쟁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유영준 감독은 이수중 시절부터 시간 날 때마다 일본과 대만 등에 가서 아마팀과 프로팀의 연습 방식 등을 살펴보며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육성 시스템을 도입하는 지도자로 정평이 나 있다. 정승구는 "감독님이 NC 다이노스에서 감독대행과 2군 감독 등을 역임해 연습이나 선수 관리가 체계적"이라며 "그 시스템 속에서 성장할 수 있어서 웅지세무대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수가 "지난 1년은 대학 강의를 들으며 단순히 야구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선수들은 더 좋은 성적을 거둬 학교 이름을 크게 알린다면 야구부도 해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웅지세무대 선수들이 어제와 오늘처럼 내일도 땀 흘릴 수 있기를 바란다.야구 칼럼니스트정리=배중현 기자야구 전문 칼럼니스트로 네이버에서 아마야구 등을 다루는 '야반도주'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기무라 고이치 기자가 네이버에 연재한 '야큐리포트'를 번역했으며, 김성근·김인식 감독 등과 함께 쓴 '감독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메이저리그 가이드북', '프로야구 크로니클', '킬로미터', '포수 교본' 등 다수의 야구 서적을 집필했다. 2024.02.2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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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윤의 야구 본색] 한·일 야구 격차는 배움의 깊이 차이

지난 12월4일부터 22일까지 경기도 화성시 YBM연수원에서 'KBO 코치 아카데미'가 열렸다. KBO리그 구단별 코치 구성이 다소 늦어진 탓에 예년보다 적은 13명의 지도자가 수강했지만, 배움의 열기는 변함없이 뜨거웠다.강의는 타격·수비·주루·투구 등 야구 기술을 비롯해 바이오메카닉과 데이터 활용, 리더십, 커뮤니케이션, 컴퓨터 실무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초빙돼 진행됐다. 그중에 코칭 능력 향상을 위한 '좋은 코치는 구단에 어떻게 어필하는가, 코치의 학습·대화·평가'에 대해 강의한 이는 김종문 전 NC 다이노스 단장이었다. 김 전 단장은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 최대의 결과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전문 코치(한국코치협회 인증)로 활동하고 있다. 강의를 마친 뒤 그는 "마지막 3주 차 강의라서 다들 지쳤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배우겠다는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고 감탄했다.13명의 수강생 중 아마추어 지도자 2명이 눈에 띄었다. 고교야구에서 잔뼈가 굵은 김재덕 광주동성고 감독은 "감독과 코치로 20여 년간 현장에 있다가 보니까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라며 "시야를 넓히기 위해 수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신 이론도 알게 돼 제 경험만 고집하지 않고 젊은 세대와 소통할 방법을 알게 된 게 큰 소득"이라고 밝혔다. 김재덕 감독 이전에 아마추어 지도자로 처음 수강한 이는 2021년 김정록 수진초등학교 감독이었다. 김정록 감독은 "프로 지도자 중심의 교육이지만 야구는 프로든 아마든 똑같다"면서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거나 간과하고 있던 것을 되새기는 과정이었다"고 되돌아봤다. 특히 "야구계에선 토론 문화가 드문데 '코칭 및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여러 방법론을 배운 게 도움이 됐다"면서 "중요한 것은 배우겠다는 의지"라고 강조했다.배움의 의지가 있다면 KBO 코치 아카데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실제로 김재덕 감독은 "아마추어 감독님들로부터 전화가 많이 왔다"며 "강의 내용 등을 세세하게 물어보며 내년에 수강할 뜻을 나타냈다"라고 귀띔했다. 다만 KBO 코치 아카데미는 배움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야구와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를 넓혀 더 깊고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길을 열어주는 계기인 셈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대학원에 진학해 야구를 배우는 은퇴 선수 및 지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09년 구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코치가 와세다대학원에 진학한 것을 시작으로 2013년 구도 기미야스 전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요시이 마사토 지바롯데 마린스 감독 등이 쓰쿠바대학원에서 야구를 공부했다. 이후 프로 코치로 활동하거나 프로야구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한 이들이 당연한 듯이 대학원의 문을 두들기고 있다. 이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자기 경험만이 아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원리 등을 배워 그것을 응용한 코칭의 방법론을 넓히고 싶어서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NPB)가 성장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지난 7월 국민대 스포츠산업대학원은 석사과정으로 '야구 코칭'을 만들어 가을학기부터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바이오메카닉 관련 권위자인 이기광 국민대 교수가 야구인에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배움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다. 하지만 가을학기에 수강한 야구인은 단 3명. 봄학기에 추가로 신청한 이는 단 1명도 없었다. 자칫하면 폐강될 위기다. 허투루 볼 사안이 아니다. 야구 칼럼니스트정리=배중현 기자야구 전문 칼럼니스트로 네이버에서 아마야구 등을 다루는 '야반도주'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기무라 고이치 기자가 네이버에 연재한 '야큐리포트'를 번역했으며, 김성근·김인식 감독 등과 함께 쓴 '감독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메이저리그 가이드북', '프로야구 크로니클', '킬로미터', '포수 교본' 등 다수의 야구 서적을 집필했다. 2023.12.2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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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제약 시상식] '공로상' 최강야구, "예능이 아닌 야구를 하겠다"

JTBC 야구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가 4일 열린 '2023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매주 월요일 오후 10시 30분 JTBC에서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는 은퇴 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최강 몬스터즈’의 도전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승률 7할을 못 하면 프로그램 폐지’의 공약을 내걸고 뛰는 최강 몬스터즈는 초대 감독 이승엽(현 두산 베어스 감독)과 2대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박용택·유희관·이대호·정근우 등 스타 플레이어 출신들이 뛰면서 화제를 모았다. 최강 몬스터즈는 고교·대학·독립 구단과 프로 퓨처스(2군)팀과 경기를 하면서 다양한 팀과 선수들을 대중에게 소개해 왔다. 또 재능 있는 아마추어 선수들을 영입해 이들이 프로 무대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윤준호(두산)와 박찬희(NC 다이노스·이상 2023시즌), 정현수(롯데 자이언츠) 황영묵(한화 이글스) 고영우(키움 히어로즈·2024시즌) 등이 최강야구에서의 활약을 통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시상대에 오른 '최강 몬스터즈 단장' 장시원 최강야구 PD는 "야구를 예능화해서 만드는 게 쉽지 않은데, 김성근 감독과 최강 몬스터즈 선수들, 스태프들이 열심히 해서 1년 동안 잘했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장 PD는 "지난해에도 촬영 외에 150회 이상을 모여 훈련을 했다. 촬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야구를 잘 하기 위해서였다. 내년에도 그렇게 훈련을 해서 야구를 야구답게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목표다"라고 말했다. 그는 "김성근 감독님과 함께 하면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산다는 게 뭔지 느꼈다. 감사하다"라면서 "몬스터즈 선수들도 본인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생각 전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장 PD는 "예능이라 보는 게 아니라 야구를 정말 열심히 한다는 부분을 시청자분들이 봐주시는 거 같다. 거기에 중점을 둬서 '야구를 할 생각'이다"라며 앞으로의 각오를 다졌다. 윤승재 기자 2023.12.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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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성근의 돌직구 “사장들은 2~3년 후 떠난다. 야구 미래 고민하겠나” [창간 54]

일간스포츠가 창간 54주년을 맞아 '레전드의 일침'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에서 드러난 한국 야구에 대한 부진 이유를 되짚어 보고, 개선 방향을 논의하자는 취지입니다. 본지는 하리모토 이사오(한국명 장훈), 이토 쓰토무, 다카쓰 신고, 김성근 등 한국과 일본 야구에 정통한 레전드부터 일침(一針)을 들었습니다. 한국 야구가 다시 도약하길 바라는 이들의 ‘비수 같은 훈수’를 독자 여러분과 야구 관계자들에게 전합니다. 여든이 넘은 노장(老將)은 지금도 야구장에 있다. 예능 프로그램 '최강 야구'에서 최강 몬스터즈를 이끄는 김성근 감독은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장(서울 노량진야구장)에서 보내고 있다. 한국 야구의 현실을 누구보다 상세하게, 냉정하게 말해줄 그를 만났다.김 감독은 201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후지나미 신타로(볼티모어 오리올스) 등을 처음 봤다고 한다. 일본의 고교생들을 관찰한 그는 이때부터 한일 야구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느꼈다."당시 협회장을 비롯해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관계자들에게 물었다. (야구 발전을 위한) 10년 대계(大計)가 있느냐고. 답이 없을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더라. 경기장에 와서 자리나 지키다가 중간에 가버리더라. 아마추어 협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 야구단 사장도 모그룹에서 오지 않나? 그들은 2~3년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간다. 이런 상황에서 사장이 야구의 미래를 고민하겠느냐는 말이다. 또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도 이사회(야구단 사장 모임)의 영향을 받는 구조다. 중요한 포스트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누가 사명감을 가지고 야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수업뿐 아니라 ‘진짜 교육’ 필요그는 인터뷰 내내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동력은 그것뿐이라고 역설했다."돈이나 지위를 좇는 사람은 절대 미래를 그리지 못한다. 현재에 안주하거나 다른 자리를 찾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감독은 연승을 달릴 때 연패를 대비해야 한다. 관중이 많을 때 KBO는 위기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게 한국 야구의 현실이다. 거기에 야구인의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다."김성근 감독은 KBO리그의 기량 저하를 걱정했다. 한국 투수들의 구속이 예전보다 빨라진 건 틀림없다. 그러나 제구력 등 기술적인 발전이 동반되지 않았다고 그는 지적했다. 특히 수비 실책을 남발하는 건 경기장을 찾아준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지적했다."이건 아마추어로부터 시작된 문제라고 본다. 유소년부터 중고교생까지 괜찮은 선수들이 꽤 있지만, 전체적인 기량은 하향평준화 되고 있다. 감독‧코치들이 어떻게 가르칠지 몰라 선수들이 나쁜 폼을 고치지 못한다. 그러면 부상이 생긴다.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훈련 시간은 적은데 중-고교 대회는 너무나 많다. 좋은 투수가 예선에서 많이 던지느라 정작 준결승, 결승에는 등판하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전혀 우승팀답지 않다."김 감독의 주장은 '고교 야구 주말리그제'로 대표되는 운동선수들의 학습권 보장과 연관이 있다. 이는 중고교 선수들이 정규 수업을 듣고 경기는 주말에 하라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는 "공부시키자는 걸 누가 반대하나. 그런데 억지로 수업을 들었다고 정말 교육이 됐는가? (탁상행정 탓에) 운동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오전 9시부터 오후까지 수업을 받는다면, 아침과 저녁에 훈련하면 된다"라고 주장했다.그의 비판은 유관 기관인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까지 향했다.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운동할 권리와 직업 선택권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김성근 감독은 "난 지금도 시간이 나면 책을 읽는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다. 내가 프로야구 감독을 할 때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한두 시간씩 선수들을 교육했다. 학생 야구도 정말 필요한 교육을 해야 한다”며 “요새 학교폭력 등도 이슈지만, 학교에서 일어나는 가장 나쁜 일은 선수들의 미래를 막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돈‧지위 아닌 사명감 좇아야김성근 감독은 한국 야구인 중 일본 프로야구(NPB)를 가장 오래, 깊이 들여다본 지도자다. 2005년 롯데 마린스의 인스트럭터, 2006년 정식 코치를 지냈다. KBO리그에서 감독 커리어를 마치고 2018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 고문을 맡았다. 2020년부터는 1군 코치 고문, 2022년에는 특별 어드바이저로 활동했다.김성근 감독은 "예전의 일본 야구를 생각해선 안 된다. 일본 선수들 체격이 좋아진 데다 훈련 방법도 과학적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투구와 타격 자세를 재연했다. 2023년 WBC에서 우승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미‧일 리그에서도 맹활약하는 건 탄탄한 기본기와 성실한 훈련 덕분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반면 KBO리그 선수들은 WBC에서 부진했을 뿐 아니라 부상도 워낙 많았다.그는 "WBC에 출전한 몇몇 우리 선수들을 보라. (근육이 아니라) 살이 붙어 있더라. 대회에 나갈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런 선수를 왜 뽑았나?"라고 물었다. 아마추어가 기본기를 다지는 데 소홀하고, 프로에는 체계적인 훈련을 도울 '코치의 부재'가 김성근 감독이 안타까워하는 한국 야구의 문제였다.김성근 감독은 "현재에 만족해서 그렇다. 더 발전하려고 노력해야 미래가 있다. 2007년 SK 와이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 참가했다. (일본시리즈 우승팀) 주니치 드래건즈를 두 번 만나서 예선(6-3)에서 이겼지만, 결승(5-6)에서 졌다. SK는 다음날 귀국하지 않고 일본 고치 캠프로 갔다. 코치‧선수들에게 '퍼펙트한 팀을 만들자'고 했다. 그게 SK 왕조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다시 사명감으로 이어진다."지난해 말 SK 출신 선수들이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감독님 계실 때 훈련하느라 죽을 뻔했다. 그래도 덕분에 성공했다'고 하더라. '내가 더 죽을 뻔했다'고 했더니 선수들이 '그건 맞다'며 웃더라. 나는 이 더위에도 하루 300개씩 펑고(fungo, 수비 훈련을 돕기 위해 타구를 날리는 것)를 친다. 집에 가면 온몸이 아프지만, 선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수를 살리는 게 지도자다."인터뷰 내내 김성근 감독은 한국 야구의 총체적 문제를 지적했다. 행간을 잘 읽어보면 그가 아쉬워하는 대상은 선수보다 행정가와 지도자, 즉 '야구계의 선배'였다. 절박한 현실을 외면한 채 듣기 좋은 말만 나누는 한국 야구의 현실을 꼬집었다. 끝으로 그는 지난해 소프트뱅크를 떠나면서 일본의 전설적인 홈런왕 출신 오 사다하루(83) 호크스 야구단 회장과 나눈 일화를 전했다."오 회장이 '긴상(金さん),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마지막 가는 길에 (야구계에) 혼을 선물하고 가자'고 했다. 나는 '좋습니다. 대신 악에 받쳐서 합시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답했다.”김식 기자 ◆김성근(金星根, 1941년 10월 30일~)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유지한 채 1961년부터 한국 실업야구에서 뛰었다. 선수 은퇴 후 마산상고, 충암고, 신일고 등에서 감독을 맡았고, 1982년 OB 투수코치로 프로 무대에 들어왔다. 1984년 OB 감독을 시작으로 태평양 돌핀스(1989~90년) 삼성 라이온즈(1991~92년) 쌍방울 레이더스(1996~99년) LG 트윈스(2001~2002년) SK 와이번스(2007~11년)를 거쳐 한화 이글스(2015~17년) 감독을 역임했다. SK 시절엔 세 차례나 우승을 차지하며 ‘야신(野神)’으로 불렸다. 비판 의식이 강한 탓에 구단과 잦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2023.09.28 11:00
연예일반

부부였다가 사돈 된다? “막장 소재인데 유쾌”…’우당탕탕 패밀리’, 시청률 30% 넘을까 [종합]

“독하고 많이 봤을 법한 설정이지만 유쾌하고 즐겁게 그려진다. 악역도 없다.” 부부였다가 사돈이 된다. 이른바 막장 소재이지만 ‘우당탕탕 패밀리’는 여타의 막장 작품들과 비교해 악역 없이 밝고 가벼운 분위기가 가득할 예정이다. 김성근 PD는 “같은 남자를 좋아한 연적이었다가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는 이야기도 있다”며 “악역도 없이 120회를 어떻게 하겠나 궁금할 텐데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과 대본의 힘이 이를 증명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18일 KBS1 새 일일드라마 ‘우당탕탕 패밀리’ 온라인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성근 PD를 포함해 배우 임하룡, 김보미, 이대연, 김선경, 이종원, 최수린, 안연홍, 남상지, 이도겸, 강다빈, 이효나, 주새벽, 임나영, 최우혁이 참석했다.‘우당탕탕 패밀리’는 30년 전 원수로 헤어진 부부가 자식들 사랑으로 인해 사돈 관계로 다시 만나면서 오래된 갈등과 반목을 씻고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명랑 코믹 가족극이다. 드라마는 세 가족이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중심은 ‘은성이네’ 가족이다. 은성은 철부지 막내딸이자 무명배우로, 남상지가 연기한다. 남상지는 “은성이를 대본에서 처음 보고 이 역할을 통해 재밌게 놀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하나씩 내 안의 까불이를 꺼내고 있다”며 웃었다. 이어 “언어적으로 신체적으로 자유롭게 연기하고 싶었다. 큰 도전”이라고 덧붙였다. 또 “나 또한 은성이처럼 긴 무명의 길을 걸었다”며 캐릭터에 공감한 지점을 전하며 “유쾌하지만 단단한 은성이를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 가족은 각각 자녀들의 로맨스가 그려질 예정이다. 영화감독인 선우를 연기하는 이도겸은 “은성을 통해 감성적으로 변하고 서로 성장해나가는 캐릭터”라며 “은성과의 케미 중심으로 연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실제 남상지와 MBTI, 혈액형이 같고 동갑이다. 서울로 상경해 연기를 시작하면서 처음 본 공연도 남상지가 출연했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높은 케미를 예고했다. 이를 듣던 남상지도 “도겸은 실제 내 친구의 친구”라며 “덕분에 연기하면서 편안한 분위기로 장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그 케미가 드라마에서도 돋보일 것”이라고 말했다.임하룡은 ‘우당탕탕 패밀리’에서 또 다른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하영(이효나)의 아버지 달용 역할을 맡았다. 달용은 배우 안연홍이 연기하는 정숙을 향한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감독님이 대본을 보고 내가 먼저 떠올랐더라. 극중 80살인데 내가 워낙 동안이라서 여기에 맞추기 쉽지 않았다”고 너스레를 떨며 “많은 여성 배우들을 상대하는 역할이라서 기뻤는데 아직까지는 딸과 다투는 촬영만 하고 있다. 극이 진행될수록 안연홍과 재밌는 케미가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안연홍 또한 “대본을 읽었는데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즐겁더라”며 웃었다. 지난해 ‘으라차차 내 인생’에 이어 또 한번 일일드라마에 도전하는 남상지는 “일일드라마는 편하게 매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우당탕탕 패밀리’는 재미까지 크다”며 “일일극이 올드하는 선입견이 있는데 요즘처럼 캐주얼한 콘텐츠가 소비되는 시대에 잘 맞는 트렌디함이 있다”고 자랑했다.또 목표 시청률을 묻는 질문에 남상지는 “’으라차차 내 인생’이 20%가 넘었다. 이 기세를 몰아 30% 이상 가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도겸은 “20% 돌파시 우리 드라마의 아들 딸들이 다같이 커버 댄스를 추겠다”고 약속했다. ‘우당탕탕 패밀리’는 이날 오후 8시 30분 첫방송됐다. 유지희 기자 yjhh@edaily.co.kr 2023.09.18 12:04
프로야구

[포수의 신(信)] 박경완 "공 3개로 아웃 카운트 3개 잡는 게 최고의 공 배합"

‘야신’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 사령탑(1996~1999년)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애제자’ 박경완(51) LG 트윈스 배터리 코치를 자주 칭찬했다. “팀 전력 50% 이상 차지하던 선수였다. 특히 투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리드하는 능력이 탁월했다”라며 말이다. 박경완 코치와 초·중·고교 시절, 그리고 프로 무대에서도 배터리 호흡을 맞췄던 ‘영혼의 단짝’ 김원형 SSG 랜더스 감독은 “(실점) 위기에서 투·포수가 같은 방향성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한데, (박)경완이의 사인에 두 번 고개를 흔든 기억이 없었다. 그만큼 나를 잘 알았던 포수”라고 돌아봤다. 신인 시절부터 박 코치의 리드 속에 성장하며 메이저리그(MLB) 무대까지 밟은 김광현(SSG)은 “박경완이라는 위대한 포수를 만난 건 내 야구 인생 가장 큰 행운”이라고 했다. 지도자·동료의 평가가 박경완 코치가 어떤 포수였는지 설명한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 중 한 명이었다. 영민한 리드로 투수의 능력을 극대화했고, 포구·블로킹·도루 저지 등 포수가 갖춰야 할 기본 능력도 정상급이었다. 1991년 프로 무대에 데뷔, 23시즌 동안 뛰며 우승 반지 5개를 끼었고, 4번이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홈런왕도 두 번 차지할 만큼 타격도 뛰어났다. 2000년엔 이만수 전 SK 감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포수 최우수선수(MVP)에 오르기도 했다. 상황·타자에 맞춰 공 배합 변주 줘야 김성근 감독의 ‘절대 신뢰’를 받던 선수 시절을 돌아본 박경완 코치는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솔직히 정말 큰 부담을 느꼈다. 감독님께서 투수코치 대신 나와 (투수 운영에 대해) 상의할 때도 있었다”라고 돌아보며 “감독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내가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러니 머리를 얼마나 많이 싸맸겠나”라고 웃어 보였다. 박경완 코치는 선수 연차가 꽉 찬 베테랑 시절에도 경기 복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우나에 앉아 다음 경기를 머릿속에 그리는 게 스트레스 해소법이 됐다고. 박경완 코치는 얘기를 나눈 레전드 포수 중 유일하게 ‘좋은 공 배합’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어떤 공이든 3개로 아웃 카운트 3개를 잡는 게 최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투수와 타자 그리고 상황을 전방위로 파악해서 가장 적은 개수로 최대한 많은 아웃카운트를 잡는 게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데이터, 팀 투수의 장단점, 상대 타자의 대응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 사실 얘기를 나눈 다른 레전드들도 비슷한 생각을 전했다. 박경완 코치의 생각은 조금 더 세밀하다. 그는 “몸쪽 공을 못 치는 타자라고, 눈에 익을 만큼 계속 (공이) 들어오면 못 치겠는가. 투수가 그날따라 포크볼을 잘 던진다고, 포수가 계속 같은 구종 사인을 내면 결국 한 번은 (안타나 홈런을) 맞는다. 그게 야구”라며 “공 배합이 결과론으로 평가받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야구가 확률 게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더 디테일 하게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라고 했다. 정석·공식을 따라야 할 때도 있지만, 상황이나 타자에 맞춰 변주를 주는 공 배합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얘기였다. 박경완 코치는 이해를 돕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어퍼컷 스윙을 선호하는 타자들이 많아진 추세를 전제로 승부 사례를 예로 들었다. 1사 3루 위기에 빠진 배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삼진 또는 내야 땅볼이다. 낮은 코스로 공을 던져 땅볼을 유도하는 게 정석이지만, 박경완 코치는 하이 패스트볼로 어퍼컷 스윙의 약점을 파고 들어 내야 뜬공을 유도하는 것도 돌파구라고 본다. 타자의 눈을 현혹하기 위해, 때로는 어퍼컷 스윙을 하는 타자가 강한 낮은 코스를 보여주기도 해야 한다고. 포수가 많이 아는 만큼 타자를 제압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게 박경완 코치가 말하는 이상적인 공 배합의 핵심이다. 그는 “포수는 바깥쪽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타자가 있어도, 정확히 어느 구속이나 코스에 약한지 꿰고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투수 육성은 포수의 사명감 박경완 코치는 선수 시절 당대 최고의 포수이자, 통산 314홈런을 기록한 ‘거포’였다. 좋은 포수 한 명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몸소 보여줬다. 그런 그조차 "야구는 포수 놀음이 아닌가"라고 물음에 "야구는 (흔히 말하는) 투수 놀음이 맞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어 “타격도 좋아야 하지만, 마운드에 전력이 힘을 갖춰야 강팀이 될 수 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박경완 코치는 투수가 제 실력을 발휘하고, 성장하는 데 포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투수 관리’ ‘투수 육성’을 사명으로 여겼다. 프로 입문부터 조범현, 김성근 감독에게 지도를 받으며 새긴 야구 가치관이기도 했다. 박경완 코치는 “포수는 특별한 조연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다. 투수가 마치 엄마같이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선수 생활을 했고, 지도자인 지금도 후배들에게 그런 조언을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호흡을 맞춘 투수가 승리·세이브·홀드를 기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어떤 타자의 타점이 결승타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게 포수”라고도 힘주어 말했다. 젊은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을 땐 책임감은 더 강해졌다고 한다. 대체로 경험이 적은 투수들이 패전·추격조로 나서 1군 무대에 적응하는데, 박경완 코치는 그 투수들이 성장해야 팀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젊은 투수는 무실점 등 성공하는 경험이 계속 쌓여야 ‘내 공도 통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상대 팀과의 점수 차가 벌어진 상황이라고 해도, (투수의 성장을 위해) 일단 나부터 집중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전병두·송은범·윤길현 등 2000년대 후반 SK 마운드 주축이 되는 투수들이 저연차 시절 박경완의 배려 속에 성장했다. 물론 사명감만 동기부여가 된 건 아니다. 김성근 감독이 종종 투수 이름을 직접 꺼내며 “투수 한 번 만들어 봐라”라고 당부하면 호기심을 갖고 그 선수를 지켜봤고, 소통하고 조언했다. 박경완 코치는 “직접 표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선수 기량이 좋아지면 ‘많이 컸네’하며 뿌듯했고 나름대로 성취감도 생겼다”라고 했다. 포수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승부를 꼽아 달라고 하자, 박경완 코치는 SK 소속 시절 두산 베어스와의 2008년 한국시리즈(KS) 5차전 9회 말 1사 만루에서 채병용과 배터리를 맞춰 김현수(현 LG 트윈스)를 병살타(투수-포수-1루수) 처리하며 우승을 확정한 순간을 꼽았다. 박 코치는 “(채)병용이가 시리즈 초반, 잘 안 던지던 싱커를 보여줬다. 공이 좋았는데, 만루 위기에서 그 싱커가 생각나서 (김)현수에게 활용한 게 통했다. 타자 스윙 궤적, 공의 궤적이 선명하게 기억 난다”고 돌아보며 “공(채병용 싱커)이 정말 좋았다”라고 했다. 박경완 코치는 자신의 최고의 순간에도 조연이었다. 그는 "때로는 ‘감초’ 역할이면 충분한 게 포수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다 보면, 나중에 돌아오는 것도 있더라”라고 웃었다. 안희수 기자 anheesoo@edaily.co.kr 2023.08.07 07:20
프로야구

[인생2막] 미트 대신 쭈꾸미 든 포수 허웅 “두 번째 삶, 고마운 분들 덕분”

"사람들과의 인연 덕분입니다. 제가 받은 게 너무 많아요."허웅(40)은 지난 2017년까지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전신)의 백업 포수였다. 박경완(현 LG 트윈스 코치) 정상호(현 SSG 코치) 등 주전 포수들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견실한 수비로 투수들의 신뢰를 얻으며 치열한 경쟁 끝에 1군 50경기에 나서 마스크를 썼다. 그랬던 허웅은 그라운드를 떠나 지금은 경기도 광명 소하동에서 가족과 함께 작은 철판 쭈꾸미집을 운영 중이다. 벌써 6년 차 '사장님'이다.어떤 야구인도 평생 야구장에 있을 수는 없다. 때가 다를 뿐 결국 모두가 그라운드를 떠난다. 허웅에게 그 시간은 생각보다 조금 빨랐다. 허웅은 그라운드를 두 번 떠났다. 처음 유니폼을 벗었던 건 2006년이다. 2002년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던 그는 상무 야구단에 불합격한 후 2006년 현역 입대를 선택했다. 입대 직후 방출 통보가 날아왔다.허웅은 "포수는 상대적으로 기량이 터지는(숙성되는) 나이가 늦다. 포수로서 시작이나 다름없는 20대 중반에 방출됐으니,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다"고 떠올렸다. 넘어서기로 했다. 허웅은 "다행히 그때 부대에서 휴가를 주셨다. 부대 밖에서 힘든 기분을 모두 털어버렸다. 남은 복무 동안 계획을 다시 짰다"며 "당시 아버지는 함께 요식업을 하자고 하셨다. 나는 야구를 더 해보고 싶었다. 어머니도 날 응원하셨다"고 했다. 바로 야구로 돌아오진 못했다. 전역 후 허웅은 김해에서 부모님과 함께 호프집을 꾸렸다. 그러다 2008년 8월 일본 독립 리그로 넘어갔다. 간사이리그 키슈 레인저스에 들어가 8개월 동안 다시 포수 마스크를 썼다.두 번째 기회가 왔다. 허웅은 "현대 시절 선수단 버스를 운전하셨던 백재현 기사님이 초등학교 선배님이셨다. 성격이 너무 좋으셔서 야구장에서 공도 주워주실 만큼 선수들과 가깝게 지내셨다. 그분이 현대 코치를 거쳐 SK 와이번스로 옮기신 금광옥 코치님께 나를 테스트해 볼 수 있냐고 물었고, 기회를 줄 테니 '몸을 만들어 와라'는 답을 들었다. 그렇게 준비 끝에 2009년 입단 테스트를 봤고, 육성 선수가 됐다"고 했다. 새 유니폼을 입었다고 끝난 건 아니다. 긴 퓨처스(2군)리그 생활이 그를 기다렸다. 그러다 2011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허웅은 "당시 박경완 선배님이 부상을 입으셨을 때다. 버티던 사람에게 기회가 왔던 것 같다. 1군 무대 한번 밟아보고 싶다는 희망 하나만 가지고 있었는데, 세 번째 포수였던 최경철 형도 부상을 당해 기회가 왔다"고 했다.간신히 오른 무대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허웅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1군 통산 50경기에 출전했고, 2017년 프로야구를 떠났다.은퇴 당시 34세.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다. 허웅은 "당시 컨디션도 올라왔고, 준비가 돼 있었다. 1군에서 해낼 자신과 여유가 더 생겼을 때였다"며 "하지만 팀에 이현석, 김민식 등 어린 포수들도 있어 1군 백업으로 나설 기회가 없었다. 2차 드래프트도 노렸으나 끝내 날 지명한 팀은 없었다"고 했다. 허웅은 마지막 시즌 퓨처스리그에서 플레잉코치 보직을 받았다. 그러나 현실에는 '선수 허웅'의 자리는 없었다. 허웅은 "처음에는 플레잉코치라는 제안을 받고 새로운 도전이라는 생각에 설렜다. 그런데 이성우 선배가 영입됐고, 포수로서 내 자리는 없어지게 됐다. 그때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고 떠올렸다. 2017년 허웅의 퓨처스리그 기록은 1경기 0타석. '선수 허웅'의 마침표였다.SK 시절 인연은 소중하게 남았다. 허웅은 야구장을 떠났지만, 그를 지도했던 김성근 감독은 여전히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 사령탑으로 현장에 남아있다. 허웅은 "감독님은 늘 야구 생각밖에 안 하셨다. 뚜렷한 신념이 있으니 선수들이 믿고 따랐다"며 "저한테는 은인이다. 입단 테스트도 1군 선수들 훈련 도중에 치렀는데도 감독님께서 내 모습을 지켜보시고 좋게 평가해 주셨다"고 했다. 그는 또 "김성근 감독님께서는 야구를 놓고 편안하게 사시지 않는다. 야구하면서 순간의 아쉬움까지도 다 떠올리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쭈꾸미집을 연 것도 가까운 이의 도움이 컸다. 그는 "선수 시절 갔던 맛집을 운영하셨던 오세종 사장님이 도와주셨다. 내가 유명한 선수도 아니어서 조용히 다녔는데, 사장님이 SK 팬이셨다. 술 한잔하며 형·동생으로 지내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야구인생을 마무리하면 식당 비법을 전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은퇴 후 '형님, 저 잘렸습니다'라고 전화했더니 웃으며 '좀 쉬다 와라'라고 하신 뒤 도와주셨다"고 했다. 이어 "처음에는 이런 인터뷰를 하기 부끄러웠지만, 고마웠던 분들께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응했다"고 덧붙였다.2018년 개업 후 6년 차. 크지 않은 그의 식당은 코로나19 직격탄도 버텨내며 살아남고 있다. 허웅은 "선수는 야구를 그만두면 막막할 때가 많다. 코치를 하고 싶어도 기회와 실력이 받쳐줘야 하니 쉽지 않다"며 "그래도 난 요식업이 내 성격에 맞았다. 밝은 편이라 손님들에게도 잘할 수 있었다. 포수로 투수들을 상대하는 게 익숙해 다른 이에게 맞춰주는 것도 성격에 맞았다"고 했다. 그는 "식당 운영은 맛과 친절함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친절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친절하면 손님들은 다시 오지 않는다"며 "선수들은 매 경기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본다. 선수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 뛰어야 성공할 수 있듯 자영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야구장을 떠난 후 야구는 직업이 아닌 응원의 대상이 됐다. 허웅은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이 늘 잘 됐으면 좋겠다. 김광현·최정 등은 후배지만, 내가 존경하는 선수들이다. 그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며 "두 사람은 대스타인데도 예의를 잃지 않았고, 선배들을 존중해 주는 선수였다. 그래서 너무 멋지다"라고 했다. 허웅은 지난해 김광현이 메이저리그(MLB) 노사합의 문제로 귀국해 '엄정욱 파이어볼러 아카데미'에서 몸을 만들 때 공을 받아준 파트너를 맡기도 했다. 그는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영광이었다. 존경하는 후배가 왔으니 다 제쳐두고 갔다"며 "MLB를 다녀왔어도 옛날 내가 알던 김광현 그대로였다"며 웃었다. 두 번째 삶에 뿌리를 내린 그는 "손님들이 항상 물어본다. 야구와 장사 중 무엇이 힘드냐고. 그래서 항상 '그때 왜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후회한다'고 말한다"며 "사회는 정말 치열하다. 하루하루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때는 더 쉬고 싶고, 놀고 싶었다. 그래야 잘한다고 생각했다. 선수 시절 내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훈련량과 정신력을 갖췄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았다"고 했다.'선수 허웅'이 그랬던 것처럼 '사장 허웅'도 긍정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그는 "두 번째 삶에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특히 정신이 건강하다면 말과 행동이 긍정적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좋게 하면 자신에게 좋게 돌아온다. 그게 이 일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전했다. 앞으로 목표를 묻자 허웅은 "매출은 내려가지 않고 꾸준히 오르고는 있다"며 "장사라는 게 만족은 없다. 매출이 오르면 그걸 평균으로 잡고 새 목표를 세우게 된다"며 웃었다.차승윤 기자 2023.05.04 00:02
프로야구

[IS 피플] '2000⅔이닝' 김광현에게 '2171이닝' 김원형 감독이…”꾸준함이 대단해”

"2000이닝을 던졌다는 건 꾸준하게 해왔다는 의미다. 그 자체가 굉장하다."김광현(35·SSG 랜더스)은 지난 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3이닝을 투구, 데뷔 후 한·미 통산 2000과 3분의 1이닝을 기록하게 됐다. 역대 한국인 투수들 중 한미일 통산 2000이닝을 달성한 건 김광현까지 단 10명뿐이다.김광현의 2000이닝은 곧 그의 발자취다. 지난 2007년 SK 와이번스에서 데뷔해 77이닝을 소화했던 김광현은 이듬해 MVP(최우수선수) 수상을 시작으로 리그 에이스로 거듭났다. 이후 두 차례 부상은 겪었으나 그 외에는 한결같은 에이스로 인천의 마운드를 지켰다. 2021년과 2022년에는 메이저리그(MLB)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뛰기도 했다.김광현을 지도하는 김원형 SSG 감독 역시 2000이닝 고지에 올랐던 10명의 투수 중 하나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데뷔한 그는 2010년 SK에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장장 20년 동안 마운드를 지키며 2171이닝을 소화하고 134승 144패를 기록했다.많은 이들은 김광현의 화려함에 주목한다. MVP, 국가대표 에이스, 5차례 한국시리즈 우승과 3차례 헹가래 투수 등 김광현의 커리어는 강렬한 임팩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김원형 감독이 보는 2000이닝의 가치는 꾸준함이다. 김 감독은 "한 시즌 경기 수가 늘어났으니 앞으로 2000이닝을 달성하는 선수는 더 많이 나올 것"이라면서도 "2000이닝을 던졌다는 건 꾸준하게 해왔다는 의미다. 그 자체가 굉장하다"고 김광현이 보여준 가치를 치켜세웠다.김원형 감독 역시 20년 동안 쌓은 2171이닝에 사연이 많다. 김 감독은 "(신인이던) 1991년 우연히 복도에서 고 김영덕 빙그레 이글스 감독님과 마주쳤다. 감독님께서 내게 '앞으로 20년 할 생각으로 야구해라'고 하셨다"며 "그때 난 속으로 '15년을 채우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20년을 어떻게 하라는 걸까'라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김 감독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20년을 하게 되더라. 그때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게 목표를 확고하게 해준 것 같다"고 덧붙였다.김원형 감독은 "철저한 몸 관리가 안 되면 20년을 뛸 수 없다. 나는 좀 미련할 정도였다. 야간 경기를 뛰면 일반적으로 새벽 2~3시에 잠이 든다. 그런데 난 등판 전날에는 경기 끝나자마자 11시에 자려고 했다"며 웃었다. 김 감독은 "당시 선배였던 조원우 수석 코치가 2005년 한화로 트레이드됐을 때도 그랬다. 절친한 관계니까 위로 차원에서 밥이라도 먹지 않나. 그런데 트레이드된 다음 날이 내 등판일이었다. 그래서 조 코치께 ‘미안합니다. 다음에 보시죠’라 하고 보냈다. 그때는 그럴 정도였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김원형 감독은 김광현 역시 그렇게 철저했다는 걸 안다. 김 감독은 "광현이는 어릴 때부터 몸 관리를 대충 한 적이 없다"며 "(김성근 감독 시절이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당시는 고참인 나, 조웅천, 가득염 등 고참들이 정말 열심히 했으니 후배들도 대충 할 수 없었다. 본인도 (잘하려는) 의식이 있으니 지금까지 계속 쌓여왔다"고 전했다.17번째 시즌을 맞이한 김광현의 커리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지난해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최고투수상을 수상한 후 "지금 내가 35살이니까 40살까지 5년 남았다. 5년 안에 청라 돔구장이 지어져 그곳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꿈을 전한 바 있다. 김광현의 시간은 충분하다. 200승(한·미 160승), 2000탈삼진(한·미 1717개) 등 그가 이룰 역사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3.04.11 08:06
프로야구

[인생 2막] 글러브 사장이 된 윤희상 "난 지금 사회랑 부딪히고 있다"

"주변에선 다 하지 말라고 했다. 망할 거라고…."2020년 11월이었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윤희상(38)은 휴식 없이 곧바로 인천 남동구 구월동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청춘을 바친 SK행복드림구장(현 SSG랜더스필드)으로부터 차로 10분 남짓한 거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두 번째 야구 인생이 시작됐다. 최근 본지와 만난 윤희상은 "글러브를 정말 좋아해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며 웃었다.◇취미가 새로운 직업으로윤희상은 'SK 원클럽맨'이다. 2004년 데뷔해 통산 42승을 기록했다. 2012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등판한 적도 있다. 201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선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때 "SK 왼손은 김광현, 오른손은 윤희상"이라는 얘길 들었다. 그랬던 그가 글러브 제작·판매 업체 '유니 컬렉터블'을 세워 3년째 운영 중이다.윤희상은 "처음엔 주위에서 '네가 어떻게 브랜드를 만들어서 팔아?'라고 많이 걱정하더라. 취미로만 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다"며 "처자식이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나. 그런데 아내(이슬비 씨)가 '후회할 일 하지 말고 하고 싶으면 해봐'라고 하더라. 그렇게 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돌아봤다. 선수 시절 윤희상의 취미는 글러브 해체였다. 그는 "원정 경기를 가면 술을 마시거나, 다른 선수들처럼 PC방을 다니지 않았다. 손을 다칠까 봐 장갑을 끼고 커터 칼로 글러브를 다 뜯고 길들이는 게 취미였다"며 "글러브를 조각내 모눈종이에 스케치해보기도 했다. 그걸 본 (김)광현이나 (최)정이나 (김)성현이는 '그럴 바에야 그냥 직접 만들어보라'고 하더라. '글러브 만들면 내가 사용해줄게'라고 하는 선수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과거 영광을 함께한 동료들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샘플을 만들거나 의견을 들을 때 도움을 준다. 김광현은 메이저리그(MLB) 첫 시즌이던 2020년 '유니 글러브'를 착용하고 스프링캠프를 소화했다.◇"쪽팔리게 뭐하고 있냐?"윤희상의 글러브는 주문 제작 제품이다. 인터넷 발주가 많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도 꽤 있다. 처음엔 모든 게 어려웠다. 11세에 야구를 시작해 20년 넘게 야구만 했던 그에게는 손님 응대부터 난관이었다. 윤희상은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는 글러브도 별로 없는 텅 빈 곳이었다. 유튜브 구독자도 3명(3일 기준 1750명)이었나. 가게 홍보를 하는데 주변에서 '쪽팔리게 뭐하냐'고 하더라. 가게에서 혼자 점심 먹다가 손님이라도 오면 정말 민망했다.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건데 나 자신이 초라하기도 했다"며 "(엄)정욱이 형은 돈을 아무리 줘도 답답해서 여기 못 있겠다고 하더라.(웃음) 손님이 많으면 힘들기도 하지만, 지금은 가게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말했다. 글러브는 100% 수작업이다. 가죽 종류는 크게 소(스티어)와 송아지(킵)으로 나뉜다. 프로 선수들은 착용감이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의 글러브를 사용한다. 윤희상은 주문이 들어오면 손 모양과 손목 각도,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도안을 만든 뒤 장인(匠人)과 소통하면서 제작한다. 그는 "만들어진 걸 보고 괜찮다 싶으면 선수에게 주고 그게 아니면 다시 수정한다. 그 단계를 몇 번 거쳐야 완성품이 만들어진다"며 "(선수와 장인 사이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재밌다. 원하던 형태의 글러브가 나왔을 때는 즐거움이 크더라. 글러브 제작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지만, 만드시는 분이 혼자여서 하루에 2~3개 정도만 가능하다. 그래서 (주문이 들어오면) 대기 기간이 있다"고 설명했다. ◇"어깨가 건강했으면 어땠을까"윤희상은 팀 동료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 순간 은퇴를 결정했다. 그는 "아파서 그만둔 거라서 크게 미련은 없다. 투수는 상관관계처럼 서로 도와줘야 하는데 어린 선수들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이 정도면 오래 했다"며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어깨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은 한다. 훨씬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신인 윤희상은 '파이어볼러'였다. 프로 2년 차이던 2005년 최고 구속이 153㎞/h. 그는 "155㎞/h가 목표였다. 1이닝 3실점 하고 강판당해도 152㎞/h를 기록했다는 게 너무 행복해 일기장에 쓰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시련은 예기치 못한 순간 찾아왔다. 2006년 오른 어깨에 칼을 댄 것이다. 병명은 슬랩(SLAP·관절와순병변)이었다. 어깨 수술을 하면 야구 인생이 끝난다는 인식이 많았던 시기. 실제 윤희상의 재활 치료 기간은 꽤 길었다. 1군에서 본격적으로 공을 다시 던진 건 2011년이었다. 그는 "4년 동안 재활 치료를 하고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아파서 못 던지겠더라. 타자로 (전향)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며 "김성근 감독님이 SK에 부임한 뒤 '안 아프게 던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게 프로'라고 하시더라. 엄청 크게 와 닿아서 그때부터 안 아프게 던지는 걸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윤희상은 통증을 참고 던졌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면 의사마다 '안 아파요?'라고 되물었다.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 결과 2012년 개인 첫 10승을 따내기도 했다. 버티고 버티던 어깨는 2019년 투구를 멈췄다. 두 번째 어깨 수술(회전근개 인대 손상)을 받은 뒤로는 회복하지 못했다. 석회화가 진행돼 뼈에서 인대가 떨어져 나갔다.2020년 초인적인 힘으로 잠시 1군에 복귀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윤희상은 "5경기를 선발로 나간다고 하면 선택을 해야 했다. 2경기를 전력으로 던지고 3경기는 살살 던져야 어깨가 회복됐다. (시즌 초반인) 4~6월에는 '지금 세게 던지면 시즌이 끝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항상 있었다"며 "주변에서는 '왜 세게 안 던지냐'고 많이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내 어깨 상태에서 정말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얘길 했다. 항상 그랬다"고 돌아봤다. ◇"글러브 1만개를 만들고 싶다"윤희상의 성실함을 잘 아는 구단에선 코치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윤희상은 "(코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안 올지 모른다. 주변에서도 기회가 왔을 때 잡으라고 그러더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게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더 경험하고 사회와 부딪혀서 몸으로 느껴야 할 게 훨씬 많다. 야구 선수로서 경험하지 못했던 걸 지금 하는 셈이다. 다시 저 생활(야구장)로 돌아간다면 거기서도 물론 배울 게 있지만 아직은 아닌 거 같다"고 말했다.어렵게 실현한 꿈을 조금 더 키우는 게 꿈이다. 그는 "글러브 1만개를 제작하고 여러 글러브를 착용도 해본 뒤 자체 공장이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다. '유니 글러브'의 대표가 되고 공장을 차린 뒤 장인들을 모셔서 한 곳에서 만드는 거다. 천천히, 그리고 길게 보고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인천=배중현 기자 2023.04.0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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